[꼬꼬무] KT 납치사건,김대중 납치사건을 재조명

개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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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1. 26.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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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에서는 미스터리하고도 충격적인 희대의 납치사건인

'암호명 KT 그리고 흑색공작원' 편이 공개된다.

KT 납치사건 또는 김대중 납치사건을 알려진 이 내용은 큰 전말은 이렇다

* 요약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이듬해 대한민국 중앙정보부가 유신 반대운동을 주도하던 재야 정치인 김대중에게 저지른 납치 및 살인미수 사건이다. 대담하게도 일본에 있는 김대중을 납치하고, 먼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 했다. 그러다 미국 정부에게 배의 위치가 탄로나는 바람에 계획을 포기한다. 결국 김대중은 일본 도쿄도에서 실종된 지 닷새째 되던 날 밤에 서울 동교동 자택 앞에서 발견된다.

 

 

* 정부 개입설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 정부 개입설을 부정했다. 일본 경찰이 범인의 지문을 채취하는 등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포착하고 사건 관련자들의 출두를 요구하자 이를 거부해버린다. 이 때문에 일본에선 주권 침해에 대한 비판 여론이 대두, 한일 정기 각료회의 연기나 대륙붕 석유탐사를 위한 한일 교섭이 취소되는 등 한일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된다. 결국 미국의 배후 영향력 행사와 한일 간의 절충 끝에 김대중의 해외 체류 중 언동에 대한 면책, 김종필 국무총리의 진사 방일 등에 합의, 사건 발생 86일 만에 끝났다.

* 의문점

이 사건에 대해 경찰이 수사 은폐하려는 의혹이 일었다. 사건 직후 박정희에 의해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나 아무런 성과없이 1년 후인 1974년 8월 14일 내사중지했으며, 다시 1년 후인 1975년 7월 21일 내사종결했고 그대로 묻혀버렸다. 그리고 수사본부가 작성한 당시 수사자료를 보면 엄청난 범위를 수사를 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정작 찾은 증거는 전무. 당시 수사본부 부본부장이었던 당시 마포경찰서장 이흥세는, 실제로 수사본부가 한 수사는 서류조사밖에 없었다고 증언했다. 

또한 당시 여당인 공화당에서는 오히려 사건이 김대중의 자작극이 아니냐는 주장을 했다. 이에 대해 정일형 의원은 국회에서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에게 사건에 대해 질문하면서 “무엇 때문에 한 정권이 개인을 상대로 하여 이토록 심한 피해망상증에 걸려 있는지 알 수가 없다"며 강하게 비판하다가 이에 항의하는 여당 의원들과 몸싸움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기도 했다.

게다가 이 사건은 이미 국제적으로 알려진 상황이라서 유신정권은 욕을 잔뜩 먹었고, 납치사건이 일어난 해인 10월에는 서울대 문리대가 동맹휴학을 하고 유신반대 연좌데모를 시작하면서 유신반대운동이 시작되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시위주동자들을 무자비하게 체포하는 걸로 맞섰지만, 이미 불붙기 시작한 유신반대운동은 경북대, 부산대 등 지방까지 번져, 12월이 되자 김수환 추기경, 장준하 선생, 함석헌 선생 등의 주도로 개헌청원 100만 서명운동을 벌이고, 이듬해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1호를 발령하게 된다. 그러나 계속해서 저항이 계속되었고 이에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를 연달아 발령한다. 그리고 그 해 광복절 날 영부인 육영수가 김대중 납치사건에 격분하여 박정희의 암살을 시도한 재일교포 문세광의 저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추가로 북한 또한 김대중 납치사건을 계기로 모든 남북대화를 중단한다고 선언하였으며 남북관계는 다시 얼어붙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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